삼성의 큰 별이 지다

삼성의 제 2대 회장 이건희회장 별세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로 2014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5개월만이다. 그는 1987년 삼성의 제 2대 회장이 되어, 27년간 삼성을 이끌었다. 당시 회장 취임 직후에 오는 90년대까지 삼성그룹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발전시키겠으며 앞으로 각종 사회봉사사업을 비롯한 문화진흥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별도의 기구를 구성할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던 그는 삼성의 성장을 이끌었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손꼽아지는 이건희 회장이 일궈낸 삼성의 경영철학과 그의 발자취를 알아보려고 한다.

 

고 이병철 회장의 막내아들 삼성의 제 2대 회장이 되다

194219일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건희 회장은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1974년 상경해 학교에 다녔고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부친의 엄명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어린 시절 영화 감상과 애완견 기르기 등에 심취했고 유학생 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고 재학시절에는 레슬링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고 이병철회장(왼쪽)과 고 이건희회장(오른쪽)의 어린시절 (출처: 삼성)

 

1970년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하이테크 산업 진출을 모색했고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삼성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 20여 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일으킨 소위 왕자의 난덕분에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면서 이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유년기에는 삼성그룹을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다른 두 형과는 대조적으로 실무적인 면에서 의욕을 보였고 또 실적까지 올리면서 이건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선친인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고 이건희 회장의 취임식 (출처: 삼성)

 

이 회장은 남다른 집념으로 삼성을 키웠다. 당시 10조 원이었던 매출액이 2018387조 원으로 약 38배 늘었으며 이익은 2,000억 원에서 72조 원으로 259,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 원에서 396조 원으로 무려 396배 증가했다. 글로벌 TV 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 시장 1위를 달성했다. 2020년 브랜드 가치는 623억 달러로 글로벌 5위에 올랐고 스마트폰, TV, 메모리반도체 등 20개 품목에서 월드 베스트 상품을 기록하는 등 삼성은 명실공히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했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각종 수사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특검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특검팀에 의해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되자 2008년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발표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단독사면된 이 회장은 경영일선에 복귀했고 조직 재정비와 삼성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헌신했다.

 

'자식과 마누라 빼고는 다 바꿔라' - 신경영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33, 삼성은 국내에서는 많은 분야에서 1등을 달리고 있었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여전히 이류 삼류에 불과했다. 또한 일본의 기술력과 브랜드가 동남아와 중국의 낮은 인건비와 결합하면서 삼성은 세계 시장에서 더욱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동시에 21세기에는 전자 산업이 기술적 패러다임이 아날로그 기술에서 디지털 기술로 이전될 것이라는 점이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건희 회장은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를 잡기 위해 1993년 이건희 회장은 자식과 마누라 빼고는 다 바꿔라라고 임직원에게 주문하며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경영 전 부문에 걸친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신경영은 인간중시기술중시를 토대로 질 위주의 경영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삼성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세계 일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질적 고도화를 통해 21세기 글로벌 초일류기업이 되겠다는 원대한 비전을 품고 있었다. 


▲ 애니콜 화형식 (출처: 삼성)

 

신경영의 시작은 디자인 혁신으로 시작되어 삼성의 신수종 사업을 휴대전화 사업으로 정했다.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오니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휴대전화 사업에 집중하였고 '애니콜 신화'의 시작이었다. 그는 일류가 아니면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키며 품질에 문제가 있는 '애니콜 화형식'을 치르는 등의 강수를 둔 끝에 19958월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

 

삼성의 사회공헌활동과 스포츠 활동

이 회장은 사회공헌활동을 기업에 주어진 또 다른 사명으로 여기고, 이를 경영의 한 축으로 삼도록 했다. 삼성은 국경과 지역을 초월하여 사회적 약자를 돕고 국제 사회의 재난 현장에 구호비를 지원하고 있다. 1994년 삼성사회봉사단을 출범 시켜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특히 기업으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단장비를 갖춘 긴급재난 구조대를 조직해 국내외 재난 현장에서 구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맹인 안내견 등 동물을 활용하는 사회공헌도 진행 중이다. 임직원 역시 매년 연인원 50만 명이 300만 시간 동안 자발적으로 보육원, 양로원 등의 불우 시설에서 봉사하고 자연환경 보전에 땀 흘리고 있다.

 

▲ IOC 위원 당시의 이건희 회장 (출처: 삼성)

 

또한, 이 회장은 IOC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국제교류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촉매제로 인식하고, 1997년부터 올림픽 TOP 스폰서로 활동하는 등 세계의 스포츠 발전에 힘을 보탰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꾸준히 스포츠 외교 활동을 펼쳐,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평창이 아시아 최초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 이건희 회장 체제하의 삼성그룹은 세계 일류의 기업으로 도약하고, 대한민국 전체 수출의 4분의 1을 책임질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비록 철두철미하고 세세한 경영관리로 인해 삼성그룹이 회장 중심으로 책임경영이 힘든 구조가 굳어져 버린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그의 위기의식과 혁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그룹은 분명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단순히 회사를 성장시킨 것뿐만 아니라 사회공헌활동을 또 다른 사명으로 여겼으며, 세계 스포츠 발전에 힘을 보탰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영면에 든 오늘 이후에도, 이건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인이며 또 가장 유능했던 경영인으로 한동안 회자될 것이다. 이제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 시대로 접어든다. 이건희 회장의 업적을 이어 가면서도, ‘준법 경영을 확보하며 경영을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앞으로의 삼성이 기대되는 바이다.